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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상에서 얻는 가장 큰 수확이 멋진 사진이라고 생각하신다면, 저는 조금 다른 이야기를 드리고 싶습니다. 해발 2,351m의 포르투갈 최고봉 피쿠산을 오른 사람들이 공통적으로 꺼내는 단어는 '풍경'이 아닌 '버텼다'는 감각입니다.
몇 해 전 삶의 슬럼프 한가운데서 무작정 배낭을 멘 저 역시, 산이 준 가장 큰 선물이 무엇인지 능선 위에서 처음 깨달았습니다.
고통을 관통하는 힘 — 자기초월의 순간
산을 오르다 보면 반드시 한 번은 '여기서 멈추면 어떨까' 하는 생각이 찾아옵니다. 제가 직접 겪어보니, 그 생각은 대체로 체력이 아닌 정신력이 먼저 바닥을 칠 때 옵니다. 발가락 통증이 발목까지 올라오고, "내가 왜 사서 이 고생을 하나"라는 회의감이 머릿속을 꽉 채울 때—바로 그 지점이 등반의 진짜 시작입니다.
심리학에서는 이를 자기효능감(Self-Efficacy)이라는 개념으로 설명합니다. 자기효능감이란 '나는 어려운 상황에서도 해낼 수 있다'는 스스로에 대한 믿음을 의미합니다. 단순한 자신감과 다른 점은, 이 믿음이 반드시 실제 경험을 통해 쌓인다는 것입니다. 피쿠산처럼 2,000m를 훌쩍 넘는 극한의 환경에서 정상에 닿는 경험은, 그 자체로 강력한 자기효능감의 증거가 됩니다. 출처: American Psychological Association
포기하고 싶었던 순간을 스스로 설득해 넘어선 기억은 이후 삶에서 '재사용 가능한 심리적 자산'이 됩니다. 쉽게 말해, 산에서 만들어진 그 기억은 직장에서 벽에 부딪혔을 때도, 관계가 틀어졌을 때도 꺼내 쓸 수 있는 일종의 내면의 증거물이 되는 셈입니다. 제 경험상 이건 정말 다릅니다. 그날 이후 힘든 상황이 올 때마다 '그 능선도 넘었는데'라는 문장이 머릿속에서 자동으로 재생됩니다.
한 달 반이라는 긴 유럽 여정의 마지막 행선지로 피쿠산을 선택한 것은 탁월한 서사 구성이라고 생각합니다. 여행이 길어질수록 감각은 무뎌지고 새로운 풍경도 결국 일상이 되어버립니다. 그 타이밍에 온몸의 에너지를 쏟아붓는 극한의 도전을 배치하는 것은 느슨해진 정신을 바짝 조여주는 완벽한 의식(Ritual)과 같습니다. 여기서 의식이란 특정 행위를 통해 하나의 시간대에 의미 있는 마침표를 찍는 상징적 행동을 말합니다. 이 의식이 성공적으로 작동할 때, 긴 여정 전체가 하나의 이야기로 응축됩니다.
- 극한 상황에서 포기 충동을 넘어설 때 자기효능감이 형성된다
- 완주의 기억은 이후 삶의 어려운 순간에 꺼내 쓸 수 있는 심리적 자산이 된다
- 여정의 마지막을 극한 도전으로 마무리하면 전체 경험이 하나의 서사로 완성된다

비행기보다 높은 곳에서 — 자연치유가 일어나는 방식
운해 위로 태양이 솟아오르는 순간을 처음 본 건 슬럼프가 가장 깊었던 시절이었습니다. 솔직히 이건 예상 밖이었습니다. 밤새 저를 짓누르던 불안과 불면증, 미래에 대한 조바심이 그 찬란한 빛 속에서 순식간에 증발하는 기분이었습니다. 무언가를 '이해'해서 사라진 게 아니라, 그냥 규모의 압도로 휘발되어버린 느낌이었습니다.
심리학에서는 이 현상을 경외감(Awe)이라는 개념으로 연구합니다. 경외감이란 자신의 이해 범위를 초월하는 광대하고 압도적인 대상을 마주할 때 발생하는 복합적 감정 상태를 말합니다. 캘리포니아 버클리대학의 연구에 따르면, 경외감을 경험한 사람은 일시적으로 자기중심적 사고가 줄어들고 친사회적 행동이 증가하며 스트레스 반응이 완화되는 것으로 나타났습니다. 출처: UC Berkeley Greater Good Science Center
피쿠산은 화산 폭발로 형성된 화산구(Caldera)를 품고 있습니다. 화산구란 화산이 분출한 이후 함몰되거나 폭발로 형성된 원형 분지를 말하는데, 이 특수한 지형 위에서 하룻밤을 보내며 은하수를 올려다보는 경험은 단순한 야경 감상과는 차원이 다릅니다. 제 경험상 이런 지형에서 느끼는 고요함은 도심의 어떤 힐링 프로그램으로도 대체하기 어렵습니다.
'정복'이라는 표현이 오랫동안 등산을 설명해 왔지만, 저는 그 단어가 틀렸다고 생각합니다. 실제로 정상에 서면 인간이 산을 정복하는 게 아니라, 산이 인간을 치유하는 쪽에 가깝습니다. 발아래로 구름이 깔리고, 실제로 비행기가 내 발 아래를 지나는 풍경을 보는 순간—일상에서 거대하게 느껴졌던 걱정들이 맥락을 잃어버립니다. 자신이 한없이 작아지는 경험이 역설적으로 해방감을 주는 것입니다. 피쿠산의 별빛 아래서 느꼈을 그 고요한 평온은, 치열하게 버텨낸 자에게만 허락되는 대자연의 가장 공평한 보상일 것입니다.
자주 묻는 질문
Q. 피쿠산 등반, 체력이 없어도 오를 수 있나요?
A. 해발 2,351m라는 숫자가 주는 부담이 크지만, 제가 직접 겪어보니 체력보다 정신력이 더 결정적이었습니다. 다리 경련이나 체력 고갈은 거의 모든 등반자가 경험하는 공통 관문입니다. 충분한 사전 트레킹 경험과 천천히 오르는 페이스 조절이 체력 부족을 상당 부분 보완해줍니다.
Q. 피쿠산 화산구 캠핑, 실제로 가능한가요?
A. 네, 정상 인근 화산구 지점에서의 야영을 통해 일몰과 은하수를 동시에 경험하는 것이 피쿠산 등반의 핵심 하이라이트 중 하나입니다. 다만 고산 지대 특유의 기온 급강하와 강풍에 대비한 장비 준비가 필수입니다. 사전에 현지 가이드 정보를 꼭 확인하시길 권합니다.
Q. 등산이 정말 멘탈 회복에 도움이 되나요? 과장 아닌가요?
A. 과장처럼 들릴 수 있다는 거 압니다. 저도 처음엔 반신반의했습니다. 그런데 UC 버클리 연구팀의 경외감(Awe) 연구를 보면, 압도적인 자연을 마주할 때 자기중심적 사고가 실제로 줄어들고 스트레스 반응이 완화된다는 결과가 있습니다. 제 경험상으로도 능선에서 맞은 새벽이 어떤 상담이나 휴식보다 빠르게 머릿속을 비워줬습니다.
Q. 긴 여행의 마지막에 등반을 배치하는 게 왜 효과적인가요?
A. 여행이 길어지면 새로운 것도 결국 일상처럼 느껴지기 시작합니다. 그 타이밍에 온몸의 에너지를 쏟는 극한 도전을 배치하면, 무뎌진 감각이 다시 날카로워지고 이전의 모든 경험이 하나의 서사로 묶이는 효과가 있습니다. 마치 책의 마지막 장이 앞의 모든 내용을 의미 있게 만들어주는 것과 같습니다.
결론
현대인은 편리함을 추구하도록 설계된 환경 속에 살고 있습니다. 그래서인지 역설적으로, 가장 강렬하게 살아있음을 느끼는 순간은 온몸의 근육이 비명을 지르는 '자발적 고난' 속에 있는 경우가 많습니다. 피쿠산 등반이 단순한 관광을 넘어서는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습니다.
정리하면, 이 산이 주는 것은 두 가지입니다. 포기하고 싶었던 순간을 넘어선 자기초월의 기억, 그리고 일상의 소음을 단번에 잠재우는 자연치유의 경험. 이 두 가지는 사진첩에 담기지 않지만, 삶 속에서 오래 남습니다. 슬럼프가 찾아오거나 스스로가 작게 느껴지는 날, 한 번쯤 '비행기보다 높은 곳'을 목표로 배낭을 꾸려보시길 권합니다.